대화의 원리와 격률
사람은 혼자서는 고독해서 살 수 없고, 함께 더불어 살아가야 하는 존재입니다. 또 함께 살더라도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발전시키지 않으면 불행하게 되는 존재입니다. 어떻게 하면 좋은 유대관계를 맺을 수 있을까요? 다양한 답변이 있겠지요. 사람들과 원만한 유대관계를 형성하기 위한 방법으로는 다양한 것들이 있겠지만, 우리가 날마다 사용하는 언어도 그중 하나라고 여겨집니다. 말을 어떻게 사용하느냐에 따라 관계가 돈독해지기도 하고, 말로 인해 관계가 소원해지거나 금이 가고 깨지기도 합니다. 인간은 두 가지 상반된 욕구를 지니고 있습니다. 하나는 다른 사람과 관계를 맺고자 하는 욕구, 즉 관련성의 욕구이고, 다른 하나는 자신의 개인적 영역을 침해받고 싶지 않은 욕구, 즉 독립성의 욕구입니다. 독일의 철학자 쇼펜하우어는 대인관계에서 나타나는 애착의 욕구와 독립성의 욕구 간의 갈등을 '고슴도치의 가시'에 비유하였습니다. '추운 겨울, 고슴도치들은 추위를 피하기 위해 한 곳으로 모여 서로에게 다가간다. 그런데 너무 가까이 다가가다 보면, 그 날카로운 가시에 서로 찔리게 되니까 다시 멀어지게 된다. 그러다 보면 다시 추워진다. 서로에게 다시 다가간다. 이렇게 여러 차례를 반복하다 보면 가시에 찔리지 않을 만큼의 거리를 유지하면서도 추위를 적절히 피할 수 있을 만한 최적의 지점을 찾게 된다. 고슴도치의 가시는 서로 간의 가장 적정한 거리를 결정해 주는 근거가 된다.' 쇼펜하우어가 쓴 이 우화를 흔히 '고슴도치의 딜레마'라고 부릅니다. 인간관계에 있어, 서로 친밀함을 원하면서도 동시에 적당한 거리를 두고 싶어 하는 욕구가 공존하는 모순적인 심리상태를 일컫는 것이겠지요. 우리가 언어를 통해 어떤 메시지를 전달하고자 할 때, 그것을 '분명하고 명료하게' 전달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하지만 상대방을 얼마나 잘 배려하여 말을 하느냐 하는 문제는, 성공적인 의사소통의 가장 중요한 열쇠라 할 수 있습니다. 언어사용의 가장 본질적인 원리는 '명료성'과 '공손 성'이라 할 수 있습니다. '분명하고 명료하게 표현'하는 것은, 상대방에게 정확하고 효율적으로 의미를 전달하기 위한 것입니다. 그에 반해, '공손하게 표현'하는 것은, 화자가 청자를 배려하면서 의사를 전달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날마다 맞닥뜨리는 실제적인 의사소통 상황에서는 상대방에게 정보를 전달하는 것만이 최상의 목표는 아닙니다. 그보다 우선적으로 원만한 대인관계, 다시 말해 화자와 청자가 긍정적인 관계를 유지해야 의사소통을 성공적으로 수행할 수 있습니다. 쇼펜하우어의 우화를 빌려 표현하면, 인간이라는 고슴도치들도 필요로 인해 관계를 맺지만, 각자 가진 가시투성이의 본성으로 인해 서로에게 상처를 입힙니다. 그래서 갈등을 피하고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기 위한 방법으로 '예의'를 발명했으리라 여겨집니다. 언어학자 로빈 레이코프(Robin Lakoff) 교수는 명료성과 공손성을 언어사용, 즉 화법 내지 대화의 양대 축으로 보았습니다. 즉, 말을 할 때는 '분명하게 말하라(Be clear)'는 것입니다. 그리고 '공손하게 말하라(Be polite)'는 것입니다. 레이코프 교수는 이 두 가지를 의사 소통상의 중요한 활용능력 규칙으로 간주하였습니다. 특히 공손성은 대화를 할 때 상대방에게 예의를 지켜야 한다는 것으로, 공손하지 않은 표현은 최소화하고, 공손한 표현은 최대화하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대화가 작동하는 원리
우리가 매일 주고받는 대화는 어떻게 작동하는지를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원활한 소통과 원만한 관계를 형성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대화의 원리'를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 우리는 아침에 눈을 뜨면서부터 잠들기 전까지 여러 사람들과 의사소통을 하게 됩니다. 의사소통은 우리의 생활 속에서 너무나 익숙하고 자연스럽게 이루어지는 행위이기 때문에, 여기에 어떤 규칙이나 원리를 찾는 것이 낯설게 여겨지기도 합니다. 갈등을 피하고 효과적이고 성공적인 의사소통을 하기 위해서는, 그것을 구성하고 있는 원리를 찾아내는 작업이 필요합니다. 말하는 원리, 즉 '화법의 원리'는 문법 규칙과는 다릅니다. 문법 규칙은 언어체계의 문제이지만, 화법은 언어사용의 문제입니다. 의사소통하기 위해서는 문법 규칙을 준수해야 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상호 간의 협력과 배려가 없이는 불가능합니다. 따라서 화법의 원리는 추상적 공간에서 이루어지는 문법과는 달리 구체적인 상황과 맥락에서 작용하는 원리라 할 수 있습니다. 원활한 소통을 하기 위해서는 대화 참여자들이 서로 협력해야 합니다. 언어철학자 허버트 폴 그라이스(Herbert Paul Grice)는 이러한 의사소통의 원리를 객관적으로 규명하고자 하였습니다. 그라이스는 근본적이고 합리적인 사고에서 출발하여 상호협력을 목적으로 하는 대화에서는, 효과적이고 효율적인 언어의 사용이 중요하다고 보았습니다. 대화를 하는 데 있어서 어떤 묵시적인 지침들이 필요하다고 보고, 그라이스는 이것을 '격률(maxim)'이라고 명명했습니다. 그라이스는 원활한 대화가 이루어지기 위해 화자와 청자가 협력해야 할 네 가지 원리를 제시하였습니다. 양의 격률(maxim of quantity), 질의 격률(maxim of quality), 관련성의 격률(maxim of relation), 그리고 태도의 격률(maxim of manner)이 그것입니다.
격률
먼저, 양의 격률은 대화에서 〈필요한 양만큼의 정보만을 제공하라〉 는 것입니다. 협동적인 대화가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필요 이상의 정보를 제공하지 말고, 적절한 정보를 많지도 않고 적지도 않게 제공해야 합니다. 예컨대, 지하철이나 버스에서 누군가의 발을 밟았을 때, 간단하게 미안한 표정으로 '죄송합니다'라고 하면 될 것을 구구절절 장황하게 변명만 늘어놓는다면, 듣는 사람은 얼마나 짜증이 날까요? 이 경우에는 필요한 양만큼의 정보만 제공하라는 양의 격률을 어긴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반대로 정보를 적게 제공하는 경우도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누군가가 자신의 친한 친구가 운영하는 식당에 들러 하루에 매출이 얼마나 되는지 물었는데, '좀 돼'하고 간단히 대답을 끝낼 경우, 이는 구체적인 정보를 제공하기를 원치 않는다는 것을 뜻합니다. 다음으로, 질의 격률은 〈거짓을 말하지 말라, 진실만을 말하라〉는 것입니다. 적절한 증거 없이 말하지 않고, 자신이 거짓이라고 믿는 것을 대화상대에게 말하지 않는 것입니다. 이를테면, 누군가가 길을 물었을 때, 사실 자신도 잘 모르면서 우측으로 100미터쯤 가면 된다고 엉터리 정보를 제공하는 것을 들 수 있습니다. 이것은 제공하는 정보가 참된 것이 되도록 하라는 질의 격률을 위반한 것입니다. 증거가 불충분한 것을 마치 잘 아는 것처럼 말하고, 거짓된 정보를 사실인 양 말하는 것은 대화의 원리에 어긋납니다. 피치 못할 사정으로 거짓말을 할 때도 있지만 협동적 대화원리라는 측면에서 볼 때, 선의의 거짓말도 질의 격률을 위반한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셋째로, 관련성의 격률은 〈관련성 있는 정보를 제공하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대화 맥락과 연관된 이야기가 아닌 전혀 엉뚱한 동문서답을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이를테면, 아침에 잠에서 깨어 아내가 남편에게 지금 몇 시인지를 물었는데, 남편이 〈피곤해, 물 한잔 줘요〉라고 답하는 것은 질문과는 전혀 관련이 없습니다. 이처럼 우리는 대화를 할 때, 상대방의 말에 신경 쓰지 않고 뜬금없이 일방적으로 자기 말만 떠들어서는 안 됩니다. 관련성의 격률은 원활한 대화를 진행하기 위해 꼭 필요한 규칙이라 할 수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태도의 격률은 〈분명한 태도로 말하라〉는 것입니다. 태도의 격률은 일명 '방법의 격률'이라 부르기도 합니다. 대화할 때에는 모호하거나 중의적인 것을 되도록 피해야 합니다. 가령, 수업이 끝난 후 같이 영화 보러 갈까라는 친구의 질문에 〈글쎄, 집에도 가야하고... 밥도 먹어야 하고..., 컨디션도 별로고..., 영화도 보고 싶고...〉라고 답한다면, 이는 조리 있게 말하지 않고 모호한 태도를 취하고 있어 태도의 격률을 어기고 있는 것입니다. 모호성을 피하기 위해서는 중의적이거나 불분명한 표현을 삼가고 간결하고 말해야 합니다. 이상에서 살펴보았듯이, 대화는 두 사람 이상이 모여 이루어지는 상호작용의 과정이라 할 수 있습니다. 상호작용이 원활하게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대화에 숨어 있는 구조와 원리를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 대화의 원리는 화자와 청자가 서로 협력해야 한다는 사실에 기반하고 있습니다. 그라이스가 제시한 네 가지 격률의 핵심을 키워드로 제시해 보면, 양의 격률에서는 '정보'가 중요하고, 질의 격률에서는 '진실'이 중요함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관련성의 격률에서는 '타당성'이, 태도의 격률에서는 '명료함'이 중요하다고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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