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손성의 원리와 규칙
의사소통의 또 다른 한 축인 공손성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원활한 소통이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그라이스가 제시한 '협력의 원리(cooperative principle)'만으로는 성공할 수 없고, 공손의 원리가 뒷받침되어야 합니다. 공손성은 언어형식에 고정된 문법, 즉 언어체계에서 나타나기보다는 주로 의사소통 상에서 언어적으로 실현됩니다. 그 때문에 공손성은 화용적 원리나 언어사용상의 전략으로 간주됩니다. 사실상 대화에서는 공손규칙이 협력규칙보다 더 강한 힘을 갖습니다. 의사소통 상황에서 '무엇을 전달할 것인가' 하는 문제보다 '어떻게 전달할 것인가' 하는 문제에 초점을 두고 개념화한 화용적 원리가 바로 '공손성 이론(politeness theory)'이라 할 수 있습니다. 오늘날 상대방과 불필요한 갈등을 피하고 원만한 대인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공손성 이론에 대한 관심이 갈수록 높아지고 있습니다. 공손이론은 언어학뿐만 아니라 사회학, 심리학, 커뮤니케이션 분야 등에서도 활발하게 연구되고 있습니다. 공손이론은 언어학에서는 화용론(pragmatics)이나 사회언어학(sociolinguistics) 분야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흥미롭게도 공손에 대한 연구는 언어학자들에 의해서가 아니라 사회학자들에 의해 시작되었습니다. 그중에서 대표적인 학자로는 에밀 뒤르켐(Emile Durkheim)과 어빙 고프먼(Erving Goffman)을 들 수 있습니다. 특히 공손이론에 지대한 영향을 준 것은, 고프먼이 제시한 '체면', 즉 'face'라는 개념입니다. 그렇다면 '체면', 즉 '얼굴이란 도대체 무엇일까요? 고프먼은 체면을 '공적인 자아상(public self-image)'이라고 보았습니다. 체면이란 개인에 대한 타인들의 인식으로서, 사람은 누구나 자신의 체면이 손상되는 것을 원치 않습니다. 고프먼은 사회적 삶의 본질을 사람들의 상호관계 가운데 형성되는 의례로 간주합니다. 인간은 누구나 '사회적 만남(social encounters)' 속에서 살아갑니다. 따라서 우리는 상대를 통해서 자신을 판단합니다. 누군가가 자신을 어떻게 판단하는지가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타인의 평가와 그것에 대한 나의 반응은 예상보다 중요하고 매우 일상적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어느 사회 집단에서든 이를 두고 암묵적인 규칙과 질서가 생겨나게 됩니다. 고프먼은 '자존심 규칙과 배려 규칙이 함께 작용한 결과, 만남이 지속되는 동안, 사람은 자기 체면과 다른 사람들의 체면이 모두 유지되도록 처신하는 경향이 있다'라고 보았습니다.
브라운과 레빈슨의 연구
공손이론 연구에서 브라운(Brown)과 레빈슨(Levinson)의 업적을 빼놓을 수 없습니다. 이들은 고프먼의 체면 개념을 비롯하여 다양한 견해들을 받아들임으로써 공손이론에 대한 종합적인 체계를 확립했습니다. 브라운과 레빈슨은 공손현상을 설명하기 위해 다음과 같은 두 가지 가정에서 출발합니다. 첫째, 사회구성원은 누구나 체면을 지니는데, 이 체면은 '적극적인 체면 positive face'과 '소극적인 체면 negative face'으로 구분됩니다. 적극적인 체면은 자신의 행위가 인정받고 이해되기를 바라는 욕구와 관련되는 반면, 소극적인 체면은 자신의 자율영역이 타인으로부터 침해받지 않는 권리를 말합니다. 둘째, 사회구성원은 상대방의 체면을 보호하기 위해서 적절한 언어적 수단을 사용할 수 있는 합리적 능력을 소유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브라운과 레빈슨은 공손성을 '체면(face)'이라는 개념과 결부시켜, '체면위협 행위 Face Threatening Act', 즉 FTA로부터 체면을 보호하기 위한 전략으로 설명하였습니다. 공손은 상대방의 '체면'을 보호하는 행위와 관련됩니다. 브라운과 레빈슨은 모든 문화에는 보편적으로 나타나는 체면을 위협하는 행위들이 있음을 지각하고, 이런 행위들을 '체면위협 행위, FTA'라고 일컬었습니다. 우리가 말하는 대부분의 언어행위, 즉 화행은 본질적으로 대화참여자에게 체면위협 행위가 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이러한 체면위협, 즉 상대에게 부담을 주는 행위를 최소화하기 위해 여러 가지 공손책략을 사용합니다. 다시 말해, 우리는 일상적인 커뮤니케이션 상황 속에서 다양한 체면위협 행위들을 하게 되는 상황에 봉착합니다. 이때 상대방의 체면손실 위험의 정도에 따라 여러 가지 언어적 전략들 중에서 적절한 하나를 선택하게 됩니다. 대화참여자의 상대적인 거리감과 체면위협의 정도는 화자와 청자 간의 힘, 즉 권력과 사회적 거리, 그리고 부담의 크기에 따라 결정됩니다. 일반적으로 우리는 청자의 체면을 위협하는 강도가 높을수록 전략적으로 더욱 공손한 언어형식을 선택하여 대화를 무리 없이 수행합니다. 이와 같이 공손성의 정도는 브라운과 레빈슨이 언급한 힘, 사회적 거리, 부담의 크기 외에도 성별, 연령, 직업 등과 같이 다양한 요소의 영향을 받는다고 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화자는 체면손실 위험의 정도를 고려하여 상대방의 체면을 보호하기 위해 상황에 맞는 적절한 언어적 전략을 구사하게 됩니다. 브라운과 레빈슨은 상대방의 체면위협의 정도에 따라 화자가 선택할 수 있는 언어적 전략을 다섯 가지로 정리했습니다. 도식에서 보듯이, 화자는 체면위협 행위, 즉 FTA를 실행해야 할 상황에 봉착했을 때, FTA를 할 것인지 말 것인지를 선택하게 됩니다. 이때 FTA를 수행하는 것이 상대방의 체면손실의 정도가 너무나 크다고 판단될 경우, 〈5번 전략〉을 선택하게 되는데, 이는 FTA의 수행을 포기하는 경우를 말합니다. 이것은 '체면위협 행위 자체를 하지 않는 전략(no request strategy)'이라 할 수 있습니다. 반면에, 화자가 FTA를 수행할 수 있다고 판단할 경우, 화자는 그것을 '명시적 표현의 전략 on record strategy'으로 할 것인지, 아니면 '암시적 표현의 전략 off record strategy'으로 할 것인지를 선택하게 됩니다. 이때 상대방의 체면손실 위험이 매우 크다고 판단될 경우, 〈4번 전략〉인 '암시적 표현의 전략'이 사용됩니다. 이것은 간접적인 암시라 할 수 있습니다. 예컨대, 〈문 닫아!〉라는 직접적인 표현 대신, 〈여기 좀 춥네!〉하고 간접적인 전략을 사용하는 것을 들 수 있습니다. 그에 반해, '명시적 표현의 전략'은 직접적인 요구라 할 수 있습니다. 명시적 표현의 전략은 '완화 행위가 있는 경우(with redressive action)'와 '완화행위가 없는 경우(without redressive action)'로 나누어집니다. 후자인 '완화행위가 없는 경우'에는 〈1번 전략〉을 사용하게 됩니다. 이것은 FTA가 상대방의 체면손실 위험을 거의 초래하지 않는다는 판단에 근거하여, 화자가 FTA를 직접적이고 더 분명하게 노골적으로 행하는 경우를 말합니다. 예컨대, 〈사람 살려!〉, 〈조심해, 저기 뱀이 있어!〉, 〈급해, 빨리 물 좀 가져와!〉 등에서처럼 긴급하거나 위급한 상황에서 말하는 경우, 상대방의 체면에 대한 위협을 최소화하기 위한 노력을 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에 반해, '완화행위가 있는 경우'는 FTA를 직접적이고 분명하게 행하기에는 상대방의 체면손실 위험이 따르기 때문에 완화형식을 수반하는 것을 말합니다. 이 완화형식은 다시 체면을 구성하는 요소에 따라 두 가지로 구분됩니다. 하나는, 적극적인 체면 positive face를 보호하는 전략으로서 〈2번 전략〉인 '적극적 공손(positive politeness)'으로 실현됩니다. 다른 하나는, 소극적인 체면 negative face를 보호하는 전략으로서, 〈3번 전략〉인 '소극적 공손(negative politeness)'으로 나타납니다. 적극적인 체면은 사람들에게 이해받고 싶고, 사랑받고 싶고, 칭찬받고 싶은 욕구를 고려한 것으로 적극적 공손으로 표출됩니다. 적극적 공손에 대한 예로는, 〈너, 참 대단하구나!〉, 〈네 말이 맞아!〉, 〈배고프겠구나, 뭐 좀 먹을래?〉 등에서와 같이 존중받고 싶고, 관심받고 싶은 상대방의 욕구를 인정하여 칭찬과 관심, 동의와 지지를 보내는 것입니다. 그에 반해, 소극적인 체면은 사람들에게 자신의 영역을 침해받거나 방해받고 싶지 않은 욕구, 즉 일정한 거리를 두고 싶은 욕구를 감안한 것으로서 소극적 공손으로 표출됩니다. 소극적 공손에 대한 예로는, 〈만약 시간이 되면, 좀 도와줘요.〉, 〈귀찮게 하고 싶진 않은데, 워낙 급한 일이라서,...〉, 〈제가 바보같이 정신이 없어 인사드리는 걸 깜빡했네요.〉 등에서처럼 강요와 침해당하고 싶지 않은 상대의 욕구를 고려하여 강요를 하지 않거나, 설사하더라도 최소한도로 하는 것입니다. 또 책임을 상대방이 아닌 본인의 탓으로 돌리고, 사과를 하면서 강요하고 싶지 않은 마음을 상대에게 전달합니다. 결론적으로, 브라운과 레빈슨의 FTA 이론은, 상대방의 체면손실 위험도가 적으면 적을수록 FTA는 직접적으로 행해지고, 체면손실 위험도가 높으면 높을수록 FTA는 보다 더 간접적이고 암시적으로 행해져, 보다 높은 번호의 전략들이 수행된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이와 같이 상대방의 체면을 보호하는 공손행위는 화행의 간접성과 밀접한 관계가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상의 다섯 가지 FTA 전략 가운데, 가장 핵심적인 것으로는 적극적 공손과 소극적 공손을 들 수 있습니다. 여기서 '적극적'이라는 의미는 화자와 청자의 동질성과 유대감을 강조하는 어법이고, '소극적'이라는 의미는 간섭을 받지 않으려는 청자의 마음을 고려한 어법입니다. 공손은 상대방의 체면을 보호하는 행위와 관련되어 있습니다. 적극적인 체면은 대화상대방으로부터 자신의 자아상이나 존재감을 인정받고자 하는 욕구를 말합니다. 적극적인 체면을 위협하는 행위로는 '비난'이나 '무시' 등을 들 수 있습니다. 반면에, 소극적인 체면은 행동의 자유와 같이 자신의 영역이나 권리를 침해받지 않고자 하는 기본적인 욕구를 말합니다. 소극적인 체면을 위협하는 행위로는 '명령'이나 '제안', '요청' 등을 들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적극적인 공손표현 전략으로는 상대방에 대한 칭찬이나 친밀감의 표현을 들 수 있고, 소극적인 공손표현 전략으로는 간접화행을 들 수 있습니다.
레이코프의 공손규칙
공손의 원리를 토대로 구체적으로 실현되는 공손규칙에 관해 살펴보겠습니다. 앞서 서두에서 잠깐 언급했듯이, 레이코프는 그라이스의 '협력 원칙'의 개념을 수용하여, 명료성과 공손성이라는 두 개의 화용규칙을 만들었습니다. 말을 할 때, '분명하게 말하라(Be clear)'는 것은, 정보나 지식을 최대한 효과적으로 전달하라는 그라이스의 원리와 일치합니다. 그리고 '공손하게 말하라(Be polite)'는 것은, 상호간의 원만한 관계를 유지하고 강화하는 것을 목표로 삼습니다. 레이코프는 우리가 일상적인 커뮤니케이션 상황에서 이 두 가지 가운데 하나를 선택해야 하는 경우, 공손성을 우위에 둔다고 보았습니다. 공손이론은 언어학 분야에서 레이코프에 의해 진일보하게 됩니다. 레이코프는 상호작용 과정에서 화자가 고려해야 할 공손성에 대해 세 가지 하위 격률을 세웠습니다. 첫째는, 〈강요하지 마시오(Don't impose)〉입니다. 즉, 상대방에게 부담을 주지 말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상대방과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고, 상대방의 독립성의 욕구를 존중해주라는 것입니다. 둘째는, 〈상대에게 선택권을 주시오(Allow the addressee his options)〉입니다. 즉, 상대로 하여금 선택할 수 있게 하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상대방으로 하여금 의견을 말하도록 유도하라는 것입니다. 셋째는, 〈상대를 기분 좋게 하시오(make the addressee feel good)〉입니다. 즉, 상대를 기분 좋게 만들고 친절하게 대하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항상 우호적인 태도를 견지하면 상대방과의 연관성의 욕구를 향상시키는데 기여한다는 것입니다. 레이코프가 제시한 이 세 가지의 공손규칙들 중에서, 첫 번째 두 가지, 즉 〈강요하지 마시오〉와 〈상대에게 선택권을 주시오〉는 화행의 완화형식으로서 브라운과 레빈슨의 '암시적 표현의 전략(off record strategy)'과 '소극적 공손(negative politeness)'과 연관을 맺고 있습니다. 그리고 세 번째 〈상대를 기분 좋게 하시오〉는 연대의식이나 친근감의 표현으로서 '적극적 공손(positive politeness)'과 연관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레이코프는 이러한 세 가지 공손규칙은 모든 문화권에 통용되는 보편적인 성격을 갖는다고 봅니다. 그리고 개별 문화들의 차이는 공손규칙의 적용 순서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다시 말해, 위 세 가지 원리가 보편적인 원리이긴 하지만, 어느 규칙이 다른 규칙보다 우선하는가의 문제는 개별 문화와 사회마다 다르다는 것입니다. 예컨대, 격의 없는 동료의식을 강조하는 문화에서는 〈상대를 기분 좋게 하시오〉라는 세 번째 공손규칙이 일차적으로 선택됩니다. 반대로, 개개인의 행동의 자율성이 강조되는 문화에서는 〈강요하지 마시오〉라는 첫 번째 규칙이 주로 선택됩니다. 레이코프는 후에, 세 가지 기본적인 공손전략으로 '거리감(distance)', '배려(deference)', '동료애(camaraderie)'를 제안하였습니다. '거리감'은 자신이 초기에 세운 첫 번째 공손규칙인 〈강요하지 마시오〉와 관련됩니다. 그리고 '배려'는 두 번째 규칙인 〈상대에게 선택권을 주시오〉와 관련되며, '동료애'는 세 번째 규칙인 〈상대를 기분 좋게 하시오〉와 결부된다고 하겠습니다.
리치의 공손규칙
언어학자 제프리 리치(Geoffrey Leech)는 공손규칙을 더욱 정교화시켜 레이코프가 제안한 세 가지 공손규칙보다 더 포괄적인 원칙을 수립하였습니다. 리치 역시 공손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그라이스의 협력원칙에서 출발하여 공손이론을 체계화시켰습니다. 리치의 공손성 원칙은 〈상대방에게 공손하지 않은 표현은 최소화하고, 공손한 표현은 최대화하라〉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리치는 공손을 상호행위 차원에서 파악하였습니다. 리치의 격률은 화법 분야에서 '공손어법' 내지 '정중어법'으로 많이 알려져 있습니다. 리치는 공손을 대화참여자들 간의 협력원칙과 커뮤니케이션의 합리적인 원칙에 의해 실현되는 것으로 보고, 대화참여자들이 일반적으로 따르게 되는 규범적 성격의 공손원칙을 여섯 가지로 제시하였습니다. 첫째, 요령의 격률(Tact Maxim)입니다. 이 격률의 모토는 〈상대방에게 부담(손해)이 되는 표현은 최소화하고 이익(혜택)이 되는 표현은 최대화하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상대방에게 부담스럽지 않게 말하는 규칙입니다. 정중하고 공손한 말은 상대방이 좋아하는 쪽으로, 그리고 상대에게 이익이 되는 쪽으로 말하는 것입니다. 예컨대, 가. 지금 시간 좀 내 주세요./지금 시간 있으세요?, 라고 말하는 것보다, 나. 죄송하지만, 지금 혹시 시간 있으십니까? 아주 잠깐이면 됩니다. 라고 하는 것이 더 공손한 표현입니다. 상대의 입장을 고려하지 않고 일방적으로 명령이나 부탁, 요구를 하면 상대방에게 부담을 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질문 있습니다〉보다는 〈죄송하지만 질문을 하나 드려도 될까요?〉라고 표현하는 것이 공손성 원칙에 부합합니다. 직접적인 요구보다 질문의 형식을 취함으로써 상대방에게 거절할 수 있는 선택의 여지를 주어 상대방의 부담을 최대한 줄여주는 것입니다. 둘째, 관용의 격률(Generosity Maxim)입니다. 이 격률의 모토는 〈화자 자신에게 이익(혜택)을 주는 표현은 최소화하고, 부담(손해)을 주는 표현은 최대화하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문제를 자신의 탓으로 돌려 상대방이 이를 너그럽게 받아들이도록 말하는 규칙입니다. 관용의 격률은 앞의 '요령의 격률'을 화자의 관점에서 말한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 관용의 격률은 의사소통 과정에서 남이 하기 싫은 일을 자신이 떠맡음으로써 남을 높이고 존중하는 태도를 지녀라는 것입니다. 예컨대, 가. 안 들립니다. 좀 더 크게 말해주세요. 라고 말하기보다는, 나. 제가 청력이 좋지 않아 그러는데..,/제가 잠시 딴 생각을 하다 못 들었는데, 다시 한 번 말씀해 주시겠어요? 라고 표현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문제를 자신의 탓으로 돌림으로써 상대방이 관용을 베풀 수 있게 하는 것입니다. 〈제가 청력이 좋지 않아 그러는데.../제가 잠시 딴 생각을 하다 못 들었는데,..〉에서처럼, 못들은 책임을 자신의 탓으로 돌려 자신의 부담은 최대화하고, 대신 상대방의 부담은 최소화하는 하는 것이 정중한 표현이라 할 수 있습니다. 셋째, 찬동의 격률(Approbation Maxim)입니다. 이 격률의 모토는 〈다른 사람에 대한 비방(비난)은 최소화하고 칭찬을 극대화하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칭찬의 격률'이라고도 합니다. 예컨대, 두 사람의 대화에서, 갑: 내 남자친구 어떤 것 같니? 을: 참 괜찮은 사람인 것 같은데. 이와 같이 친구의 남자친구가 마음에 들지 않더라도 〈참 괜찮은 사람인 것 같은데〉라고 대답하거나, 최소한 침묵을 지켜주는 것이 찬동의 격률을 지키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넷째, 겸양의 격률(Modesty Maxim)입니다. 이 격률의 모토는 〈자신에 대한 칭찬은 최소화하고 비방(비난)을 극대화하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스스로를 낮추어 겸손하게 말하는 규칙입니다. 겸양의 격률은 찬동의 격률을 화자의 관점에서 말한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가령, 갑: 선생님께서 좋은 아이디어를 주시고 항상 도움을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을: 천만에요. 원래 머리도 안 좋은 데다 그냥 두서없이 생각나는 대로 말씀드렸을 뿐입니다. 이 대화에서 보듯이, 겸양의 격률은 상대방의 칭찬에 대해 〈천만에요, 아닙니다, 별말씀을 다 하십니다, 여러모로 부족합니다〉 등과 같은 표현을 사용하여 자신을 낮추는 것을 말합니다. 다섯째, 동의의 격률(Agreement Maxim)입니다. 이 격률의 모토는 〈다른 사람과의 의견 차이(불일치)는 최소화하고 일치점을 최대화하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서로 의견이 다를 때 차이점을 말하기보다 일치점을 강조하며 말하는 규칙입니다. 이를테면, 갑: 이번 주말에 같이 영화 보러 갈까? 을: 영화? 좋지. 아, 그런데 지금 벚꽃축제가 한창인데 주말에 끝난다고 하던데. 갑: 그래? 그럼 벚꽃축제 갈까? 이 대화에서처럼 일단 상대방의 의견을 존중해 줌으로써 상대방과의 일치점을 강조한 다음, 자신의 의사를 밝히는 것이 갈등이나 대립을 피하는 바람직한 방법이라 볼 수 있습니다. 여섯째, 공감의 격률(Sympathy Maxim)입니다. 이 격률의 모토는 〈자신과 상대방 사이의 반감은 최소화하고 공감은 최대화하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반감을 드러내기보다는 일단 상대방의 관점에서 문제를 바라보고, 상대방을 이해하려고 노력하는 공감적 능력을 말하는 규칙입니다. 예컨대, 갑: 언니, 나, 어제 엄마랑 싸웠어. 을: 뭐, 엄마랑 싸웠다고? 넌 어째 그 모양이니? 성질이 못 돼 가지고. 이 대화는 더 이상 진척되기 어렵습니다. 그에 반해, 갑: 언니, 나, 어제 엄마랑 싸웠어. 을: 뭐, 엄마랑 싸웠다고? 왜 무슨 일이 있었어? 갑: 응, 어제 내가 입고 나가려고 다림질을 부탁한 옷이 안 되어 있었거든. 을: 그래 많이 속상했겠다. 엄마가 예전 같이 않게 요즘 들어 건망증이 심해지신 것 같아. 이 대화에서는 일단 상대방의 말에 관심을 보이고 이해하려고 합니다. 이와 같이 공감은 믿음과 친밀감을 가지도록 하는데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리치가 제안한 여섯 가지 공손원칙은 서로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는 것끼리, 각각 쌍으로 묶을 수 있습니다. 요령 원칙과 관용 원칙, 찬동 원칙과 겸양 원칙, 그리고 동의 원칙과 공감 원칙으로 묶을 수 있습니다. 각 원칙의 모토를 다시 한번 간단히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먼저, 요령 원칙과 관용 원칙을 보면, (1) 요령 원칙: 상대방 비용은 최소로 이익은 최대로 하시오. (2) 관용 원칙: 자신의 이익은 최소로 비용은 최대로 하시오. 두 번째로, 찬동 원칙과 겸양 원칙을 보면, (3) 찬동 원칙: 상대방 비난은 최소로 칭찬은 최대로 하시오. (4) 겸양 원칙: 자신의 칭찬은 최소로 비난은 최대로 하시오. 세 번째로, 동의 원칙과 공감 원칙의 경우, (5) 동의 원칙: 상호 간 반대는 최소로 동의는 최대로 하시오. (6) 공감 원칙: 상호 간 반감은 최소로 공감은 최대로 하시오. 이상에서 살펴본, 브라운과 레빈슨, 레이코프, 그리고 리치의 공손이론 규칙의 밑바탕에 깔려 있는 기제는, 크게 두 가지로 요약해 볼 수 있습니다. 하나는 자신을 낮추는 것이며, 다른 하나는 상대를 높이는 것입니다. 언어가 커뮤니케이션을 하기 위한 인간의 욕구에서 비롯되었듯이, 공손 역시 사회공동체 안에서 다른 사람들과의 조화와 배려, 연대감을 형성하기 위한 인간의 마음에서 비롯되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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