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어에 대한 고전 범주화 이론에 대한 반기
고전 범주화 이론에 반기를 든 경험적 증거들에 관해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첫째는, 고전이론의 제1원리, 즉 〈범주는 필요충분 자질의 집합이다.〉라는 것에 대한 반기입니다. 철학자 비트겐슈타인은 일찍이 『철학적 탐구』라는 책에서 최초로 범주화의 고전이론에 대한 한계를 예언한 바 있습니다. 비트겐슈타인은 '가족유사성(family resemblance)'이라는 은유를 사용하여 고전이론의 제1원리에 대한 불합리성을 지적하였습니다. 앞에서 살펴보았듯이, 고전이론의 제1원리에 의하면, 고전적 범주는 필요충분 자질의 결합으로서 구성원들이 필요충분 자질의 공통속성을 가진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비트겐슈타인은 범주의 구성원들이 갖는 공통 속성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입증하였습니다. 비트겐슈타인은 '게임'이라는 낱말을 어떻게 정의해야 할 것인가라는 문제에 천착하였습니다. '게임'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전개하면서 대상의 유사성을 특징짓는데 있어 '가족유사성'보다 더 좋은 표현은 없다고 주장하였습니다. 가족 구성원들 사이에는 체격이나 용모, 눈 색깔이나 걸음걸이, 성격 등에서 닮은 점이 있을 수 있지만, 가족 구성원 전부가 특정한 자질들을 공유하는 것은 아닙니다. 가족 구성원들을 살펴보면, 다양한 자질들 가운데 몇몇 자질만이 중첩되고 교차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게임'이라는 범주에도 '가족유사성'이 나타납니다. 우리는 '게임'이라는 의미를 밝혀내기 위해 어떤 자질들이 '게임'이라는 범주를 특징짓는가라는 물음을 제기해 볼 수 있습니다. 고전이론에서와 같이 자질 묶음의 형태로 정의를 내리려고 하면, 모든 게임에 공통적으로 적용되는 속성이 무엇인지를 먼저 알아내야 합니다. 그런데, 테니스, 축구, 체스, 바둑, 카드 게임, 보드 게임 등과 같이 수많은 종류의 게임에서 공통적인 자질 한 가지만이라도 뽑아내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게임'이라는 범주에 속하는 모든 구성원들이 다 똑같은 공통적인 자질을 드러내지는 않기 때문입니다. 가령, 모든 놀이가 즐거운 것도 아닙니다. 또 모든 놀이가 경쟁적인 성격을 지닌 것도 아닙니다. 또 모든 놀이가 둘씩 혹은 셋씩 하는 것도 아닙니다. 더 나아가, 게임에 속하는 것과 게임이 아닌 것을 언제나 분명하게 구분할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따라서 의미 범주들 간의 경계들이 분명하지 않습니다. '게임'이라는 범주는 고정되어 것이 아니라 단지 비슷한 유사성의 그물망으로 짜여 있을 뿐입니다. 이와 같이 게임들 간에는 서로 몇 가지 전형적인 속성을 공유할 뿐, 모두에 해당되는 공통적인 자질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범주 경계의 모호성
둘째는, 고전이론의 제2원리, 즉 〈범주는 분명한 경계를 갖는다.〉라는 것에 대한 반기입니다. 수학자 자데(Zadeh)는 '퍼지 집합(fuzzy set)' 이론을 통해, 그리고 사회언어학자 라보브(Labov)는 '모호한 가장자리 현상' 실험을 통해, 범주의 경계가 분명하지 않다는 사실을 밝혀내었습니다. 그러니까 이것은 고전이론의 제2원리, 즉 범주의 자질은 이분법적이며, 분명한 경계를 갖는다는 것에 대한 모순을 지적한 것입니다. 퍼지 이론은 버클리 대학 수학교수 자데가 동료교수들과의 사교 모임에서 누구의 아내가 더 미인이냐는 농담을 주고받다가 우연히 착상한 것이라고 합니다. '퍼지(fuzzy)'라는 말에는 '애매한, 흐릿한, 모호한, 명확하지 않은, 불분명한' 등과 같은 뜻이 담겨 있습니다. 자데는 '퍼지 집합'이라는 논문에서, 전통적인 집합이론은 '남자들의 집합', '자연수의 집합' 등과 같이 범주의 경계가 명확한 경우만을 다룬다고 지적하였습니다. 이와 같이 범주의 경계가 뚜렷한 것을 '크리스프 집합(crisp set)'이라고 합니다. 똑 부러진다라는 뜻이지요. 하지만 '예쁜 사람', '키가 큰 사람' 등과 같이 범주의 경계가 똑 부러지지 않고 모호한 '퍼지 집합'도 있다는 것입니다. 자데는 수학에서 크리스프 집합만을 다룰 뿐, 퍼지 집합을 의도적으로 제외시킨 것에 심각한 문제가 있음을 발견하고 퍼지 집합의 중요성을 역설하였습니다. 예컨대, 〈X는 홀수이다〉라는 문장과 〈X는 키가 크다〉라는 문장을 비교해 보면 이해하기가 쉬울 것입니다. 〈X는 홀수이다〉라는 문장은 크리스프 집합에 해당됩니다. 그것은 '남자'나 '자연수'에서처럼 홀수가 무엇인지 그 의미 내용을 별도로 설명할 필요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이치나 사리에 비춰볼 때, 너무나 당연하고 자명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에 반해, 〈X는 키가 크다〉라는 문장은 퍼지 집합에 속합니다. 이것은 범주의 경계가 모호하고 불분명합니다. 여기서는 '크다'라는 의미가 무엇인지에 대한 개념 정의가 필요합니다. 왜냐하면 '키가 큰 사람'과 '예쁜 사람' 등은 주관적이고 상대적인 성질을 지니고 있으므로 분명하게 경계 지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한편, 사회언어학자 라보브는 가정에서 사용하는 용기(用器)들에 대한 언어적 범주를 연구하였습니다. 라보브는 컵이나 사발, 꽃병과 머그잔들 간에 분명한 경계가 있는지를 알아보기 위해 '컵(cup)'에 대한 실험을 진행하였습니다. 그는 실험대상자들에게 다양한 크기와 모양의 용기 그림들을 보여준 뒤, 그것이 무엇인지를 답변하도록 요청하였습니다. 실험에 참가한 사람들은 동일한 그림을 보고도 각자 다른 답변을 하였습니다. 손잡이가 있고 높이와 폭의 관계가 1:1인 전형적인 컵의 그림은 별다른 이의 없이 컵이라고 대답하였지만, 다른 그림들의 경우에는 대답이 아주 다양했습니다. 우리는 모두 '컵'이 무엇인지를 알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가장 전형적인 컵이란 어떤 것일까요? 전형적인 컵은 〈용기〉로서 〈높이와 폭의 관계가 대략 1:1〉 정도이고, 〈손잡이가 있는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곰곰이 생각해 보면, 컵이라는 범주를 구성하고 있는 이러한 자질들 가운데 실제로 구속력이 있고 강제적인 자질은 단 하나도 없습니다. 모든 컵이 손잡이를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또 모든 컵이 높이와 폭의 관계에서 1:1의 비를 보이는 것도 아닙니다. 그리고 모든 컵의 용도가 마시기 위해 사용되는 것도 아닙니다. 마시기 위해 사용되는 것이 아니라 장식용으로 사용되는 컵도 있고, 화초에 물을 주기 위해 사용되는 컵도 있습니다. 또 모든 컵이 유리나 세라믹으로 만들어진 것도 아닙니다. 플라스틱 컵도 있고, 심지어 나무로 만든 컵도 있을 수 있습니다. 물론 컵은 모두 '용기'라는 공통적 속성을 지니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 경우에도 경계선상에 있는 것들이 있습니다. 가령, 쏟아낼 수 없는 내용물로 이미 가득 채워져 있는 장난감 컵의 경우에는 용기의 기능이 없어져 버렸습니다. 범주화를 할 때 우리가 긋게 되는 경계는 맥락에 따라 달라지기도 합니다. 컵같이 보이지 않는 용기, 즉 비전형적인 컵도 커피를 마시는데 사용된다면 컵으로 볼 수도 있습니다. 따라서 컵으로 간주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몇몇 자질들이 들어맞아야 하겠지만, 이들 자질 중에서 어느 것이 들어맞아야 하는지 명확히 정해져 있지는 않습니다. 라보브의 실험에서 밝혀진 '모호한 가장자리 현상'은 용기 모양에만 국한되어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러한 현상을 낱말 의미의 경우에도 적용해 볼 수 있습니다. 예를 들면, '밤'을 어떻게 정의할 수 있을까요? 또 '밤'과 대척점에 있는 '낮'은 어떻게 정의할 수 있을까요? 경계가 분명한가요? '밤'과 '낮'의 경계를 생각해 보면, 어디에서 밤이 끝나고 낮이 시작되는지 모호합니다. 또 우리의 몸에서 어디까지가 이마이고, 어디까지가 머리인가요? '이마'와 '머리'의 경계 또한 분명하게 긋기 어렵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본질적으로 연속적인 대상세계를 낱말의 단위로 분절하여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현실 세계는 연속적이지만 언어 세계는 불연속적입니다. 이를테면, 프리즘에 나타난 광선은 빨강과 보라를 양극으로 하여 그 사이는 경계가 없는 연속체를 이루고 있습니다. 하지만 언어는 이것을 연속체로 묘사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편의상 빨강·주황·노랑·초록·파랑·남색·보라 등과 같이 해당 언어의 관습에 따라 몇 개로 분할하여 나타내어야 합니다. 그래서 무지개 색깔은 문화에 따라 다를 수 있습니다. 지금은 대부분의 나라에서 일곱 색깔이라고 말하지만, 옛날 우리 조상들은 오색 무지개라고 했습니다. 멕시코 원주민인 마야인들 역시 무지개 색깔을 검정, 흰색, 빨강, 노랑, 파랑과 같이 다섯 가지 색깔로 보았습니다. 아프리카의 일부 부족들은 무지개가 두세 가지 색깔로 이루어졌다고 말합니다. 사실 무지개의 색깔은 무려 134~207가지의 색으로 구분될 수 있다고 합니다. 무지개 색깔이 이토록 많은데도 불구하고 연속적인 대상을 언어로 분절하다 보니 단지 몇 가지 정도로 실현된 것일 따름입니다. 지금까지 살펴본 자데의 '퍼지 이론'과 라보브의 '모호한 가장자리 현상'은 고전 범주화에서처럼 범주의 경계를 폐쇄적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개방적인 것으로 본다고 요약할 수 있습니다.
범주 원소의 등급성
다음으로 셋째는, 고전이론의 제3원리, 즉 〈범주의 구성원들은 동등한 자격을 갖는다.〉라는 것에 대한 반기입니다. 1960년대 말 인류학자 벌린(Berlin)과 케이(Kay)는 '기본 색채어' 연구를 통해서, 그리고 1970년대 심리학자 로쉬(Rosch)는 '원소성의 정도'에 대한 실험을 통해서 '범주의 구성원들 간의 자격은 동등하다'라는 고전이론의 제3원리에 대한 불합리성을 지적하였습니다. 범주의 원소들은 서로 대등한 것이 아니라 '가장 전형적이고 대표적인 것에서부터 비전형적인 것'에 이르기까지 위계적인 계층적 구조를 이루고 있다는 사실이 입증되었습니다. 이로써 고전이론의 탄탄한 입지가 무너졌습니다. 먼저, 벌린과 케이의 '기본 색채어'에 관한 연구를 살펴보겠습니다. 벌린과 케이는 98개 언어의 색채어를 조사한 결과, 각 언어는 색채 목록에서 색채를 임의로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단지 11개의 색채 목록으로부터 기본 색채어를 선택한다는 것을 밝혀내었습니다. 아무리 색깔이 드문 언어라 하더라도 최소한 두 가지 색깔을 나타내는 어휘는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만약 어떤 언어가 세 가지 색 어휘를 가지고 있다면 〈빨강〉을 포함하고 있고, 네 가지 색 어휘를 가지고 있다면 〈초록〉이나 〈노랑〉 가운데 어느 하나에 해당되는 색 어휘를 가지게 됩니다. 다섯 가지 색 어휘를 가지고 있다면 〈초록〉과 〈노랑〉을 모두 포함하게 되고, 여섯 가지 색 어휘를 가지고 있다면 〈파랑〉을 포함합니다. 또 일곱 가지 색 어휘를 가지고 있다면 〈갈색〉을 포함하고, 여덟 가지 이상의 색 어휘를 가지고 있다면 〈회색〉,〈오렌지색〉,〈자주색〉,〈핑크색〉 가운데 하나를 포함하게 된다고 하였습니다. 언어권에 따라 색채어 범주 사이에 경계를 긋는 데는 일관성이 없지만, 기본 색채어라 할 수 있는 '초점 색채(focal color)'를 가려내는 데에는 일관성을 보인다는 사실이 밝혀졌습니다. 다시 말해, 색채 범주의 경계는 언어마다 다르지만, 초점 색채는 보편적이며 계층적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색채어의 원소들은 서로 동등한 자격을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 중심부의 초점 색채에서부터 주변부의 비(非) 초점 색채에 이르기까지 위계구조를 이루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다음으로, 심리학자 로쉬의 '원소성의 정도'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로쉬는 실험대상자들에게 어떤 종류의 개체가 어느 정도까지 해당 범주의 좋은 예나 보기로 간주될 수 있는가를 측정하였습니다. 로쉬는 가구, 과일, 차량, 무기, 채소, 도구, 새, 운동, 장난감, 옷과 같은 10개의 범주 명칭에 대해 해당 범주의 원소들 사이에 정도성이 나타나는지를 실험한 것입니다. 실험 결과 로쉬는 범주의 원소, 즉 구성원들 간에는 '좋은 보기'와 '나쁜 보기'로 구분된다는 것을 밝혀내었습니다. 좋은 보기는 원형적인 보기, 전형적인 보기라 할 수 있으며, 나쁜 보기는 비원형적인 보기, 비전형적인 보기라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범주의 모든 구성원은 동등한 자격을 가진다'라는 고전이론의 제3원리를 무력하게 만들었습니다.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범주화의 고전이론에 반기를 든 경험적 증거들은 곧 다루게 될 '원형이론'의 기본적인 토대가 되었습니다. 물론, 범주는 공통적인 특성들에 근거하고 있다는 고전이론이 완전히 잘못되었다고 볼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인간의 마음의 본질을 규명하고자 하는 '인지언어학(cognitive linguistics)'의 시각에서 볼 때, 범주화는 고전이론이 망라할 수 없는 다양성과 복잡성을 내포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자각에 기초하여 고전이론에 대한 대안으로 원형이론이 부상하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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